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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풍경들.. ....

♣ 2026년 4월 26일(일) 예산 덕숭산 수덕사 ♣

 

추사고택에서 비교적 가까운거리

뭐가 그리 바쁜지 30분이면 갈수 있는곳이지만

추사고택만 들리고 수덕사는 들리지를 않게 된다

오늘은 수덕사를 잠깐 탐방 해 본다

 

일요일이라서 제1 주차장은 이미 만차

3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계곡을따라서

데크를 걸어가면 수덕여관이 나온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女僧)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길 없어 촛불켜고 홀로 울적에

아 ~아 !!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산길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 아 ~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

 

속세에 두고온 애절한 사연을 잊지 못헤

흐느끼는 비구니의 고뇌(苦惱)를 그린 내용이다

 

그런 애절한 사연이 있을법한 수덕사 여승(女僧)의 실재 모델은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는 누구일까?


그 대상은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때, 시대를 앞서간 신 여성(新女性) 세분이 있었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로 불리는 사의 찬미로 너무나 유명한 윤심덕이 그중 한 명이요,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이며 문장가인 나혜석이 그 한 명이고, 

나머지 한 명은 시인(詩人)으로 유명했던 김일엽이다.

이 신여성(新女性) 세 사람은 조선사회 남존여비 (男尊女卑)의

실체가 그대로 존재했던 시기에 시대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불꽃처럼 살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여인들이었다.

나혜석은 사랑에 버림 받았고,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사랑과 함께 했으며,

김일엽은 스스로 사랑을 버린 여자다.
세사람 중에서 실재 수덕사의 여승(女僧)으로 한국 비구니계의 거목의 한사람으로

추앙 받는 김일엽의 본명은 김원주다.

일엽(一葉) 이란 필명(筆名)은 춘원 이광수가

그녀의 아름다운 필체에 반해 지어준 이름이라고한다.

그런 사연 때문인지 둘 사이의 스캔들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연애대장 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자유분방(自由奔放)하게 살다 갔고

진취적인 자신의 삶을 여성운동으로
승화시켜 자유연애론과 신정조(新貞操)론을 주장하게 된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그녀는 사랑했던 남자라는 그림자가 정신적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린 여인이라면

언제나 처녀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여인을 인정할 수 있는 남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여인 그가 바로 김일엽 이란 신여성(新女性)이다.

한 마디로 남 녀가 나누는 육체적 사랑을 순결 또는 정조(貞操)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이야기다.


당시는 파격적인 주장으로 받아 들여졌지만 작금(昨今)의 세태(世態)에 비추어 보더라도

앞서가는 신세대의 사고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모든 여성들이 그러 했듯이 그녀도 극심했던 남존여비 (男尊女卑)라는

잘못된 시습(時習)의 피해자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몸소 겪었다.

그녀는 부모의 중매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남자와 속아서 결혼을 하는데

남자가 의족을 한 장애인이었다.


신뢰에 기반하지 못한 결혼생활은 일찌감치 청산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의 생활은 더욱 자유분방 (自由奔放)하게 살아가게 된다.


김일엽은 한국 최초 여자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또

일본인 오다 세이조라는 대학생과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된다.

남자 부모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데,

이때 두사람 사이엔 아들이 하나 태어난다.


아들은 아버지 친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라나게 되며

이 분이 한국과 일본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동양화가 였던 일당스님이며

이름이 김태신이고 후(後)에 김천 직지사에 계셨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것으로 기억된다?.

오다 세이조와의 사랑도 아픔으로 겪은 그녀는 곧 일본에서 돌아와 불교에 귀의(歸依)하여

수덕사의 여승(女僧)이 된다.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이 세파(世波)에 으스러지는 아픔을 이겨내고,

또 다른 참 인생의 행로를 불자의 길로 선택한 것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린 아들이 일본에서 수덕사를 찾아 왔는데, 

나는 불자(佛子)가 되었으니, 속세(俗世)에서 맺어진 너와 나의 모자(母子)의

인연은 끝이 났으므로 더 이상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고 하며

모질게도 모자의 정을 끊고자 이역만리를 찾아온 어린자식을 절 밖에서 재웠다고 한다.

이때 김일엽의 절친한 친구인 나혜석이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같이 지내며 어머니처럼 대하고 그림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이 가슴에 쌓여 해탈로 녹아내렸을까?

비구니로서 그의 인생이 한국불교계에 큰 족적(足跡)을 남긴것은

고난(苦難)의 수행(修行)이 었고 우연(偶然)은 절대 아니다.

 

모셔온글 

 


3주차장 주차후 데크길을 이용하면 수덕여관이 나온다

 

 

지금은 수덕여관은 수덕사 스님의 처소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