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과 수의과 대학의 학생들이
수원 서부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야학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1965년 당시 학생이던 황건식 등의 야학 교사들이 성금을 모금하여 이곳 부지를 구입해
교사와 학생들이 직접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했으며,…
야학교사와 졸업생들은 현재 서둔야학회를 설립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사회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이날 이곳을 찾은 황 원장은 바로 이 서둔야학의 교장선생님, 박씨는 이곳에서 공부한 학생이었다.
박씨는 주변의 들꽃을 꺾어 작은 꽃송이를 만들어 황 원장의 웃옷에 꽂아주었다. 매우 훌륭한 카네이션이다.
농학과 63학번인 황 원장은 학생들로부터 교장선생님이라 불린다.(이후 기사는 교장선생님으로 표시한다)
황 교장선생님은 “당시는 주임선생님으로 불렸는데, 나중에 후배들이 초대 교장선생님으로 불렀다”고 말했다.
후배 강석찬 선생(76학번·화성한과 대표)은 “황 교장선생님이 서둔야학의 실제적 대부이자 역사적 증거”라고 소개했다.
서둔야학은 1954년 2월 김용준 장로가 세운 서둔교회에서 시작한다.
김 장로의 아들 김성원씨(후에 건국대 학장 역임)가 서울농대에 입학해 교회에 야학을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울대 농대생들의 야학은 이보다 훨씬 과거로 소급된다. <서둔야학사>에는
1926년 김성원, 김찬도 등이 이곳 수원 서둔리에 설립한 야학을 시원(始原)으로 삼고 있다.
황 교장선생님은 “심훈의 <상록수>의 지역적 배경이 바로 이곳으로, 당시 몇 명 안된 수원고등농림
한국인 학생들이 일제가 말살하려던 우리의 말과 역사, 문화를 가르쳤던 것이 야학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실제 1930년대 농촌 계몽소설로 유명한 심훈의 <상록수>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 박동혁이 다니던
학교가 바로 수원고등농림학교, 즉 현 서울대 농대의 전신이다.
“야학을 시작했을 때는 공부를 할 교실이 없어 양계장, 잠사(누에)실, 목장사택 등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공부를 했다.
책걸상도 없이 가마니 깔고 앉아 호롱불 켜고 했다. 시설이 너무 열악해 선생님들(대학생들)이 모금해 교사를 짓기로 했다.
시멘트를 사다 직접 벽돌을 찍어 소달구지로 나르고, 나무는 학장을 졸라 농대연습림에 있는 나무를 베어 시내 제재소에서 잘라 썼다.
처음에는 8만원이면 교사를 지을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지만 23만원 들었다. 당시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1만원 정도였다.”
<서둔야학사>를 보면 당시 선생님과 학생들이 직접 건물 기초를 만들고 벽돌을 찍어 쌓는 사진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교실 대들보에는 당시 학교를 지은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교훈은 ‘참을 사랑하자’ ‘시처럼 음악처럼 살자’ ‘우리나라, 우리민족을 사랑하자’였다.
시처럼 음악처럼 살자는 교훈은 음악을 좋아했던 황 교장선생님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서둔야학은 ‘으뜸상’ ‘애씀상’ ‘더 잘함상’ 등 순수 우리말로 된 상장을 만들었다.
황 교장선생님은 ‘펼쳐진 서둔벌 바라보면서 땀 흘려 일해가는 푸른- 정신을 …
어린 우리 배움은 끝이 없구나…’로 이어지는 교가를 직접 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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