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건릉은 장조(莊祖)와 경의왕후(敬懿王后)를 합장해 모신 융릉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孝懿王后)의 합장릉인
건릉을 함께 부르는 이름이다.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효성스러운 왕을 꼽으라면 단연 정조일 것이다. 수원·화성 일대가 온통 효심의 고장이 된 데는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이장해오면서부터지만, 기실 그 언저리엔 슬픈 역사가 강물처럼 고여 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28세의 막 피어난 꽃 같은 나이에 뒤주에 갇혀 생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아버지 영조에 의해서 당쟁의 희생물로.
정조의 나이 불과 열 살에 한맺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고
달래기 위해 왕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무엇이든 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일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역적으로 남아 있는 한 정조 자신은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정조는 아버지의 온전한 복권을 위해서 온갖 노력과 눈물겨운 효심을 바쳤으니, 그것은 곧 자신이 반역자의 대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그리고 영조의 눈을 어둡게 했던, 세자를 비운의 왕자로 몰고 간 당쟁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화성 천도를 꿈꾸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능은 본디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량포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 기슭에 있었다.
정조는 즉위하면서 곧바로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蔣獻)이라 추상하고, 묘호를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바꿨다.
정조 13년(1789) 현재의 화성으로 이장해오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다시 능호(陵號)를 융릉(隆陵)으로 올렸다.
따라서 묘호도 장종(蔣宗)에서 장조(蔣祖)로 바뀌었고, 의황제(懿皇帝)로 추존했다.
따라서 어머니의 존호도 경의왕후(敬懿王后)에서 의황후(懿皇后)로 올랐다.
정조는 한 해에 몇 차례씩 아버지의 능참길에 오르는데, 때때로 눈물짓고 통곡하기를 그치지 못했다고 한다.
죽어서는 끝내 아버지 곁에 묻혔다. 갸륵한 효성이란 어느 시대 누구에게 들어도 훈훈한 미담이지만 정조의 효성은 깊은
슬픔을 동반한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 융건릉의 능역으로 들어서면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길이 나 있고, 그 길로 얼마 안 가 두 갈래 길을 만난다.
오른쪽으로 가면 융릉이고, 왼쪽으로 가면 건릉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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